'한남'부터 '설거지'까지…혐오는 따라하기를 좋아한다 [노경목의 미래노트]

입력 2021-11-15 08:36   수정 2021-11-15 09:51


"그들은 살해당했다. 그들을 죽인 세르비아인들은 작년에 추수를 도와준 사람들이었고, 어린시절 함께 뛰놀던 사람들이었고, 더운 여름날 들이나 강에서 함께 벌거벗고 헤엄치던 사람들이었다. 멀쩡한 사람들이 알 수 없는 이유로 갑자기 살인자로 돌변했다."

1992년 보스니아 내전 당시 세르비아인들에 마을 사람 35명이 살해 당하는 것을 목격한 크로아티아인의 증언이다. 세계 분쟁사를 살펴보면 이처럼 적대감이 없던 집단이 돌변해 서로를 혐오하는 사례를 종종 볼 수 있다. 글로벌 금융위기의 원인을 분석한 '블랙스완'에서 저자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는 수백년간 평화롭게 공존하던 레바논의 기독교도와 이슬람교도들이 일순간에 돌변해 어떻게 세상을 지옥으로 바꿨는지 설명하기도 했다.

온라인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식을줄 모르는 남성혐오, 여성혐오 담론도 비슷하다. 해당 담론을 생산하거나 적극적으로 소비하는 이들은 누군가의 아들, 딸이거나 오빠, 누나다. 워마드에서 '한남'을 공격하는 글을 올리는 여성과 남초 커뮤니티에 '설거지론'을 설파하는 남성은 대학과 직장에서 이성 동료들과 큰 무리없이 생활할 가능성이 크다.

무엇이 이들을 이성 혐오자로 바꾸는 것일까. 이유를 따라가다보면 미래 저출산·고령화 문제 해결이 더욱 어려워질 것이라는 의외의 결론을 만나게 된다.
부화뇌동하는 혐오 감정

물리학자인 마크 뷰캐넌은 2017년 내놓은 '사회적 원자'에는 흥미로운 실험 결과가 있다. 세 장의 카드 중 그림이 미세하게 다른 카드 한장을 가려내도록 하는 시험에서 오답을 소리 내 말하는 가짜 참가자를 배치하자 전체 오답률이 눈에 띄게 올라간 것이다. 가짜 참가자가 없을 때 참가자들은 모두 다른 카드를 가려낼 수 있었지만, 가짜 참가자가 나타나자 오답률이 40%로 치솟았다.

혼자서 차분히 판단하면 얼마든지 맞출 수 있는 쉬운 문제도 옆에서 다른 사람이 강하게 이야기하면 틀릴 정도로 쉽게 판단력이 흐려진다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인지 과정의 문제가 아니라 뇌 자체에 영향을 주는 것으로 나타났다.

본인이 판단해 답을 말할 때와 가짜 참가자에 이끌려 오답을 내놓을 때 사용하는 뇌의 부위가 달랐던 것이다. MRI로 촬영했더니 참가자가 정답을 말할 때는 계획 설계 및 문재 해결과 관련된 전두엽에서 많은 활동이 일어났다. 하지만 오답을 말할 때는 달랐다. 공간 지각가 관련된 두정엽중간고랑에서 뇌 활동이 가장 많았던 것이다. 뷰캐넌은 이같은 결과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몇몇 사람들이 소리 내어 틀린 답을 말하기만 해도 멀쩡한 틀린 답을 말하도록 강제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의식적으로 궁리한 다음에 다른 사람이나 집단의 의견을 추종하는 것이 아니라, 물체의 인지 자체를 다르게 한다는 뜻이다. 다른 사람들의 말이 진정으로 그들이 보는 것에 영향을 주는 것이다. 사회적 상황에 따라 사람들이 세상을 인지하는 방식이 달라진다.

사람들은 스스로 생각하지 못한다. 사람들이 무엇을 믿고 왜 믿는지는 사람들 사이의 상호 작용에 크게 좌우된다. 사람들은 사회적 본능에 이끌려 맹목적으로 모방하건, 다른 사람들은 나보다 더 잘 알겠거니 하면서 전략적으로 모방한다.

우리 사회에서 순응하려는 경향이 강하다는 것은, 선량하고 지적인 젊은이들이 상황에 따라서는 흑백도 뒤바뀐 생각을 기꺼이 받아들인다는 문제가 된다."

뷰캐넌은 사람들 사이의 생각이 모방을 거듭해 커다란 흐름으로 자리 잡는 것을 '사회적 눈사태'라고 표현했다. 무게를 측정하기도 힘든 눈이 계속 쌓여 어느 순간 무너져 내리며 마을을 덮치듯, 곰곰이 따져보면 논리적 결함이 많은 생각이나 아이디어가 사회를 장악하게 된다는 말이다.
미혼율과 '사회적 눈사태'

이같은 사회적 눈사태는 인식을 공유할만한 계층이나 집단이 많을수록 커진다. 사실 오늘날 남혐과 여혐의 소재로 쓰이는 사례는 과거에도 존재했다.

예를 들어 영화 '포레스트 검프'의 여자 주인공 제니는 히피로 자유연애를 즐기다 에이즈로 추정되는 불치병에 감염된 후에야 주인공 검프를 찾아온다. 그동안 검프는 우여곡절 끝에 상당한 자산가가 됐다. 남초 커뮤니티의 설거지론에 따르면 검프는 본인 노력의 결실을 그럴 자격이 안되는 상대와 나누는 '퐁퐁남'일 수 있다. 하지만 영화가 개봉한 1994년 이같은 서사는 주인공의 순애보로 널리 이해됐다.

그 사이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지난 9월 통계청이 발표한 '2020 인구주택총조사'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여기에 따르면 30대 남성 중 미혼자는 173만8000명으로 전체의 50.8%에 달했다. 30대 여성 미혼자도 만만치 않았다. 107만7000명으로 미혼율은 33.6%였다.

과거를 되짚어 보면 1990년만 해도 30대 미혼 인구는 남녀를 통틀어 6.8%에 불과했다. 2000년 13.4%, 2010년 29.2%로 10년마다 큰폭으로 늘더니 작년에는 42.5%에 이른 것이다.

검프를 순정남으로 보는 시대에 30대 남성의 90% 이상이 결혼을 했다면, 퐁퐁남으로 보는 오늘날에는 50%도 결혼을 하지 않았다. 이성 혐오가 더 빠르고 큰 폭으로 확산되기 좋은 환경이다. 행동경제학자인 최승주 서울대 경제학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전체적으로는 적은 비율이라도 많은 사람이 한쪽 방향을 선택하면 다른 사람들도 사회적 동조 압력을 받게 됐다. 결국 많은 사람들이 하려는 것을 따라하고 싶은 것이 인간의 성향이기 때문이다.

물론 비혼 자체를 터부시하는 것도 옳지 않다. 결혼을 하지 않아도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 수록 사회적 압력에서 해방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남들이 선택하지 않는 것을 선택하면 불안해지기 쉽다. 비혼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높아지는 미혼율은 비혼이 하나의 선택지로 등장한 결과로 볼 수 있다."
더 꼬이는 저출산 해법
이성 혐오와 미혼율 증가는 가뜩이나 풀기힘든 저출산 문제를 악화시킨다. 실제로 한국의 저출산 문제는 정부의 예상도 크게 뛰어넘을 정도로 심각해지고 있다. 통계청은 2019년 인구 추계에서 2045년에야 한국의 신생아 출생이 27만명 선까지 떨어질 것으로 전망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추계치를 내놓은 이듬해인 2020년 신생아 출생이 27만2000명 수준으로 급락했다.

통계청은 일반적으로 매년 예상되는 가임 여성수와 일정 속도로 하락하는 출산율을 통해 중장기간 신생아 출산을 추산한다. 하지만 미혼율 급증이라는 변수가 더해지며 이같은 예상은 크게 빗나가게 됐다.

물론 급등하는 집값과 늘어나는 청년 실업 등 미혼율 증가에 영향을 주는 요인은 많다. 하지만 급증하는 이성 혐오와 같은 뜻하지 않은 사회적 눈사태를 원인에서 완전히 배제하기도 어렵다. 저출산 문제의 해법이 더 꼬일 수 밖에 없는 이유다.

물론 실제 연관 관계를 추적하려면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전망이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박종서 연구정책실장의 설명이다.

"세대가 내려갈수록 미혼율이 늘어나는 추세가 나타나고 있지만 실제로 사회 보편적으로 확산될지를 확인하려면 좀 더 시간이 필요하다. 30대까지 결혼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생애 내내 결혼과 출산을 하지 않을 것으로 예단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서구 사회는 30대에 늘어난 미혼율이 생애 미혼으로 이어진 사례다. 하지만 한국은 여전히 가족주의 경향이 강해 그같은 경향이 지속될 수 있을지 의문이다. 가족 형성을 위한 물질적 기반이 약해지며 30대 미혼율이 높아졌지만, 나이가 좀 더 들어 기반이 갖춰지면 결혼을 선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다른 문제는 이같은 관찰이 선결된 이후에 판단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노경목 기자 autonom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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